백두대간 사람들 4 진부령- 동서는 잇고 남북은 가르고
작성일 18-08-28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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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안강 조회 219,462회 댓글 0건본문
진부령은 백두대간 마루금을 밟으며 북으로 올라온 이들의 발길을 붙잡곤 한사코 놔 주지 않는다. 눈 앞에서 향로봉이 손짓하지만 대간꾼들은 여기서 발길을 멈출 수밖에 없다. 굳게 입을 다문 초병, 바리케이드 쳐진 작전로…. 더 가야 할 길은 분단의 상처가 아물지 않은 군인들의 땅이다. 동과 서를 잇고 남과 북은 가르는 게 분단시대의 진부령이다.
‘오랜 옛날 동서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히고… 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1987년 2차선 도로로 확포장되어….’ 고개 마루 표석에 적힌 글은 진부령 길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 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히 아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은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당원이 됐고 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북으로 넘어가거나 경찰과 군인들의 눈길을 피해 고향을 등졌다. 그리곤 그 자리를 외지에서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채웠다. 변변한 밭 한뙈기 없지만 그래도 산에서 나는 산물이 풍부한 데다 너른 골짜기는 화전을 일구기에도 넉넉했다. 이들은 오로지 맨몸으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어 나갔다. 그런 이들에게 마을의 유래가 어떻고, 이름이 어떻고를 따진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부리 사람들의 주업은 산일이죠. 나물 뜯고, 버섯 따고, 산삼 찾아 산을 돌아다니고, 토종벌 치고 뭐 이런 거예요. 밭일은 지금이야 특산물이라고 치커리도 좀하고 곰취나물도 재배하곤 하지만 옛날에야 옥수수가 고작이었죠.”
자연보호 바람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향로봉 골짜기를 누비며 멧돼지도 잡고 노루도 잡았지만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지금도 눈만 내리면 골짜기에서 멧돼지나 노루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해요.” 고생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은 탓도 있지만 관청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긴 겨울을 할 일 없이 보내야 하는 진부리 사람들에게 당국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취미 삼아 총질을 하는 사람들에겐 돈 몇 푼 받고 수렵허가를 내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산을 타는 진부리 사람들의 발목은 잡는 행정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진부 사람들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욕심이 없어서 그래요. 보는 것이라곤 하늘과 산뿐인데 욕심이 어디서 생기겠어요. 또 산일을 하면서 욕심을 내면 안 돼요.” 마을에서 산삼을 가장 많이 캤다는 박응래(44)씨. 지난 여름, 오가는 길손들에게 밥이라도 팔아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소똥령이야기’라는 간판을 걸었다가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군청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장사를 포기한 박씨였지만 누구를 탓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몇 뿌리나 캤는지 기억조차 못할 만큼 많은 산삼을 캤지만 한번도 산에 기도를 드려보지 않았다는 박씨는 믿는 구석이 있다. “평소에 분수껏 욕심내지 않고 살아야지. 그러면 삼을 캘 수 있는 꿈이 와요.” 여자와 자거나 아이를 품에 안는 꿈, 살인을 저지르는 꿈 등을 꾸게 되면 그는 어김없이 산에 오른다.
‘벌도사’로 알려진 제추골 최명섭(44)씨도 산을 믿고 사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적어도 진부리 토종꿀은 진짜라고 믿어도 돼요. 겨울을 나지 않거든. 겨울을 나려면 벌을 먹여야 하는데 꿀값이 비싸니 설탕을 먹이는 경우가 왕왕 있죠.” 봄이 오면 새로 벌을 분양받거나 빈 벌통을 벌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둔다. 벌통에 야생벌이 찾아들어 만드는 꿀을 ‘설통’이라고 부르는데 천연꿀과 진배가 없다고 한다.
진부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삼을 캐는 소원을 갖고 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한번쯤은 산삼을 캐본 경험도 있다. 그러나 삼을 캐도 부자는 못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산에 혼자서는 못가요.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그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죠. 보통 2∼3명이 함께 가는데 산삼을 캤다고 해도 수입을 한번 나눠봐요. 얼마나 돼나” 박응래씨는 삼 캐서 부자됐다는 말은 도시사람들의 말장난이라고 일축한다. 산사람들이 산삼을 소원하는 것은 산신령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얻고 산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산에서 살아 갈 수 있다”는, 아버지대부터 내려오는 삶의 경귀를 진부리 사람들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진부령을 따라 흐르는 북천에서는 일제 말엽에 사금이 났다고 한다 “그때는 북천이 사금 줍는 사람들로 온통 하어요. 엄지손가락만한 금덩어리를 주어 팔자를 고쳤다는 사람도 있고요.” 당시에 일제가 금을 채굴하기 위해 뚫다가 패망으로 중지한 굴이 남아 있지만 진부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 굴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난 93년 북천을 준설할 때도 사금이 났었다지만 진부리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설가 박연희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현대 소설로 고쳐 쓰면서 홍길동의 산채의 배경으로 삼았던 진부리(陣富理). 아무도 유래를 알지 못하는 그 이름에는 어쩌면 욕심을 다스려 산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진부리 사람들을 닮으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진부령 사람들에게는 최근 새로운 희망이 하나 생겼다. 향로봉 고로쇠나무 수액 채취다. 그동안 입산이 허가되지 않았던 지역으로 들어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말쯤 진부령에 오시래요. 진짜 고로쇠 물 많이 받아 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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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나니 이제 산을 알 것 같아요”
“봄에는 나물 뜯고 여름에는 버섯을 따고 가을에는 송이를 찾고 겨울에는 설피를 신고 짐승의 발자국을 뒤쫓으며 살고 있습니다.” 산에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김명호(39)씨는 5년 전만 해도 기아자동차의 영업사원이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교사자격증까지 취득한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이 좋았습니다. 각박한 도시생활을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구요.” 꿈이던 시골생활을 이루기 위해 그는 사표를 던졌다.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승합차 한대에 살림살이를 싣고 틈만 나면 강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진동계곡, 현리, 지리산… 소문 난 곳은 다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발길을 멈춘 곳이 진부리입니다. 좋습니다. 물도 맑고 산도 좋고요.” 빈 몸이나 다름없이 들어와 정착한 지 5년, 산은 그에게 집 한 채와 적지 않은 땅까지 장만할 수 있게 해줬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산은 언제나 일한 만큼 내준다는 것도 배웠다.
5년 동안 그는 산에서 산다는 것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좌절도 많았습니다. 뜨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씩이나 했고요.”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가 힘들었다. 대학 나오고 교사자격증까지 있으면서 산골을 택한 그를 이해해주리라는 기대는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울로 돌아가자는 두 딸을 자신있게 나무랄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산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직도 힘든 일은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일이 급하지요.” 그 장벽을 허물기 위해 그는 산 일을 나가 산 속 막사에서 생활할 때면 촛불을 켜놓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로 밤을 지샌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
그는 4년째 집 앞마당에 자그마한 통나무집을 혼자서 짓고 있다. ‘양산박’이라고 이름까지 붙여둔 집을 완성해 가면서 그는 또 산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온돌은 어떻게 놓아야 하며, 낙엽송은 가시가 많아 껍질을 벗기면 안 된다는 것도 집을 지으며 배웠다. “눈이 엄청나요.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장을 본다는 게 불가능하지요.” 정착 첫해 겨우내 먹을 양식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고생했던 것도 산골살림을 빨리 배우도록 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 말은 그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이나 서울의 친구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올 때 한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아직 그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빈 몸으로 들어와 5년 만에 집도 주고 땅도 준 저 산이 잘사는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4-진부령-동서는-잇고-남북은-가르고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오랜 옛날 동서를 잇는 유일한 오솔길이었던 진부령은 1632년 간성 현감이던 택당 이식이 인근의 승려들을 동원해 좁은 길을 넓히고… 1930년 일제가 신작로를 내면서 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1987년 2차선 도로로 확포장되어….’ 고개 마루 표석에 적힌 글은 진부령 길의 유래를 어렴풋이 전해주지만, 정작 진부(陣富)라는 이름이 어떻게 생겨났는지 정확히 아는 이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진부령은 한국전쟁 전에는 북한 땅이었다. 마을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당원이 됐고 전쟁의 와중에서 목숨을 부지한 사람들도 북으로 넘어가거나 경찰과 군인들의 눈길을 피해 고향을 등졌다. 그리곤 그 자리를 외지에서 이러저러한 사연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채웠다. 변변한 밭 한뙈기 없지만 그래도 산에서 나는 산물이 풍부한 데다 너른 골짜기는 화전을 일구기에도 넉넉했다. 이들은 오로지 맨몸으로 새로운 삶의 보금자리를 가꾸어 나갔다. 그런 이들에게 마을의 유래가 어떻고, 이름이 어떻고를 따진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예나 지금이나 진부리 사람들의 주업은 산일이죠. 나물 뜯고, 버섯 따고, 산삼 찾아 산을 돌아다니고, 토종벌 치고 뭐 이런 거예요. 밭일은 지금이야 특산물이라고 치커리도 좀하고 곰취나물도 재배하곤 하지만 옛날에야 옥수수가 고작이었죠.”
자연보호 바람이 불기 전까지만 해도 겨울철에는 향로봉 골짜기를 누비며 멧돼지도 잡고 노루도 잡았지만 이제는 추억일 뿐이다. “지금도 눈만 내리면 골짜기에서 멧돼지나 노루를 잡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안해요.” 고생에 비해 벌이가 시원찮은 탓도 있지만 관청의 눈치를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긴 겨울을 할 일 없이 보내야 하는 진부리 사람들에게 당국의 이율배반적 태도는 쉽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 취미 삼아 총질을 하는 사람들에겐 돈 몇 푼 받고 수렵허가를 내주면서도, 먹고 살기 위해 산을 타는 진부리 사람들의 발목은 잡는 행정이 답답하기만 하다. 그래도 진부 사람들은 큰소리를 내지 않는다.
“욕심이 없어서 그래요. 보는 것이라곤 하늘과 산뿐인데 욕심이 어디서 생기겠어요. 또 산일을 하면서 욕심을 내면 안 돼요.” 마을에서 산삼을 가장 많이 캤다는 박응래(44)씨. 지난 여름, 오가는 길손들에게 밥이라도 팔아 살림에 보탤 요량으로 ‘소똥령이야기’라는 간판을 걸었다가 허가를 받지 않았다고 군청이 제동을 거는 바람에 장사를 포기한 박씨였지만 누구를 탓하려 하지는 않는다. 자신이 몇 뿌리나 캤는지 기억조차 못할 만큼 많은 산삼을 캤지만 한번도 산에 기도를 드려보지 않았다는 박씨는 믿는 구석이 있다. “평소에 분수껏 욕심내지 않고 살아야지. 그러면 삼을 캘 수 있는 꿈이 와요.” 여자와 자거나 아이를 품에 안는 꿈, 살인을 저지르는 꿈 등을 꾸게 되면 그는 어김없이 산에 오른다.
‘벌도사’로 알려진 제추골 최명섭(44)씨도 산을 믿고 사는 사람 가운데 하나다. “적어도 진부리 토종꿀은 진짜라고 믿어도 돼요. 겨울을 나지 않거든. 겨울을 나려면 벌을 먹여야 하는데 꿀값이 비싸니 설탕을 먹이는 경우가 왕왕 있죠.” 봄이 오면 새로 벌을 분양받거나 빈 벌통을 벌이 잘 드는 곳에 놓아둔다. 벌통에 야생벌이 찾아들어 만드는 꿀을 ‘설통’이라고 부르는데 천연꿀과 진배가 없다고 한다.
진부리 사람이라면 누구나 산삼을 캐는 소원을 갖고 있다.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한번쯤은 산삼을 캐본 경험도 있다. 그러나 삼을 캐도 부자는 못된다고 마을 사람들은 입을 모은다. “산에 혼자서는 못가요. 잘못해서 사고라도 나면 그 자리가 그대로 무덤이죠. 보통 2∼3명이 함께 가는데 산삼을 캤다고 해도 수입을 한번 나눠봐요. 얼마나 돼나” 박응래씨는 삼 캐서 부자됐다는 말은 도시사람들의 말장난이라고 일축한다. 산사람들이 산삼을 소원하는 것은 산신령이 자신을 지켜준다는 믿음을 얻고 산사람으로서 자존심을 세우는 의미가 더 크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욕심을 내지 말아야 산에서 살아 갈 수 있다”는, 아버지대부터 내려오는 삶의 경귀를 진부리 사람들은 경험으로 체득하고 있다.
진부령을 따라 흐르는 북천에서는 일제 말엽에 사금이 났다고 한다 “그때는 북천이 사금 줍는 사람들로 온통 하어요. 엄지손가락만한 금덩어리를 주어 팔자를 고쳤다는 사람도 있고요.” 당시에 일제가 금을 채굴하기 위해 뚫다가 패망으로 중지한 굴이 남아 있지만 진부리 사람들은 아무도 그 굴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난 93년 북천을 준설할 때도 사금이 났었다지만 진부리 사람들은 흔들리지 않았다.
소설가 박연희가 허균의 <홍길동전>을 현대 소설로 고쳐 쓰면서 홍길동의 산채의 배경으로 삼았던 진부리(陣富理). 아무도 유래를 알지 못하는 그 이름에는 어쩌면 욕심을 다스려 산을 닮아가며 살아가는 진부리 사람들을 닮으라는 가르침이 담겨 있는지도 모른다.
진부령 사람들에게는 최근 새로운 희망이 하나 생겼다. 향로봉 고로쇠나무 수액 채취다. 그동안 입산이 허가되지 않았던 지역으로 들어가 고로쇠 수액을 채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월 말쯤 진부령에 오시래요. 진짜 고로쇠 물 많이 받아 놀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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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이 지나니 이제 산을 알 것 같아요”
“봄에는 나물 뜯고 여름에는 버섯을 따고 가을에는 송이를 찾고 겨울에는 설피를 신고 짐승의 발자국을 뒤쫓으며 살고 있습니다.” 산에서 사는 법을 배워가고 있는 김명호(39)씨는 5년 전만 해도 기아자동차의 영업사원이었다. 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교사자격증까지 취득한 그였다. “어린 시절부터 자연이 좋았습니다. 각박한 도시생활을 더이상 견디기 어려웠구요.” 꿈이던 시골생활을 이루기 위해 그는 사표를 던졌다.
어디서 살 것인가를 고민하며 승합차 한대에 살림살이를 싣고 틈만 나면 강이 시작되는 곳을 찾아다녔다. “진동계곡, 현리, 지리산… 소문 난 곳은 다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발길을 멈춘 곳이 진부리입니다. 좋습니다. 물도 맑고 산도 좋고요.” 빈 몸이나 다름없이 들어와 정착한 지 5년, 산은 그에게 집 한 채와 적지 않은 땅까지 장만할 수 있게 해줬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산은 언제나 일한 만큼 내준다는 것도 배웠다.
5년 동안 그는 산에서 산다는 것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것을 배웠다. “좌절도 많았습니다. 뜨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씩이나 했고요.” 무엇보다도 마을 사람들의 편견과 오해가 힘들었다. 대학 나오고 교사자격증까지 있으면서 산골을 택한 그를 이해해주리라는 기대는 너무나 낭만적인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서울로 돌아가자는 두 딸을 자신있게 나무랄 수 있을 만큼 자신을 산사람이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직도 힘든 일은 많이 남았습니다. 무엇보다 마을 사람들과의 보이지 않는 장벽을 허무는 일이 급하지요.” 그 장벽을 허물기 위해 그는 산 일을 나가 산 속 막사에서 생활할 때면 촛불을 켜놓고 자신을 수양하는 일로 밤을 지샌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 더 겸손해져야 한다….”
그는 4년째 집 앞마당에 자그마한 통나무집을 혼자서 짓고 있다. ‘양산박’이라고 이름까지 붙여둔 집을 완성해 가면서 그는 또 산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운다. 온돌은 어떻게 놓아야 하며, 낙엽송은 가시가 많아 껍질을 벗기면 안 된다는 것도 집을 지으며 배웠다. “눈이 엄청나요. 눈이 내리기 시작하면 장을 본다는 게 불가능하지요.” 정착 첫해 겨우내 먹을 양식을 미리 준비하지 않아 고생했던 것도 산골살림을 빨리 배우도록 하는 계기가 돼주었다.
“어떻게 사는 게 잘사는 건지 보여주고 싶습니다.” 이 말은 그를 지켜보는 마을 사람이나 서울의 친구들을 위한 것만이 아니다. 서울을 떠나 올 때 한 자신과의 약속이기도 하다. 아직 그는 잘 살고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는 믿는다. 빈 몸으로 들어와 5년 만에 집도 주고 땅도 준 저 산이 잘사는 길을 알려줄 것이라고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4-진부령-동서는-잇고-남북은-가르고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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